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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감염 후기 (23 5 15 ~ 23 5 21)

Zeromm 2023. 6. 3. 16:59

아니 의사 선생님, 제가 코로나라뇨?!

5월 15일. 아침에 일어났을 때 두통 느낌도 있고 열감이 있었다. 목에 가래가 너무 많이 끓었고 몸이 말을 잘 안 들었다. 그래서 얼른 아침 먹고 9시에 약국 문 열었을 때, 해열제와 인후통제를 사서 복용하려고 했다. 약국을 가던 중에 뭔가 그렇게 감기약 처분만 받고 버티기엔 몸이 너무 상태가 안 좋았고, 정확하고 빠른 쾌유를 위해 병원에서 검진을 받고자 했다. 그래서 학교 근처 내과의원에서 방문했는데, 창구에서 열체크하고 38.5도라는 수치를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간호사분들이 신속항원검사와 독감 검사받는 것을 추천했고, 그냥 둘 다 해달라고 했다.
누워서 좀 쉬다가 검사받았다. 설마 했는데, 그 키트에서 두 줄이 뜰 때는 정말 믿기지 않았다. 내가 잘못 본 게 아닐까 했는데, 그러고 바로 의사 선생님께서 키트를 처분하길래 기분이 꿀꿀했다. 그러고는 간호원분이 오셔서 뭐라 뭐라 계속 얘기하시는데 솔직히 귀에 잘 안 들어왔다. 몸도 아프고 확진판정이 당황스럽고 혼란의 연속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폭풍 같은 간호사의 설명과 함께 왠지 모를 눈총이 뒤에서 느껴지는 건 꽤나 슬펐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한 외래환자로 방문해 긴 대기시간을 거쳐 검사를 받았건만, 생각도 정리하기 전에 창구에서는 내 이름을 날카롭게 불렀고, 빠르게 검진비를 결제하도록 청구했다. 그리고 얼른 귀가해 쉬라는 말에 나는 그 병원을 다시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다. 어느 곳도 섣불리 들어갈 수 없는 그런 상태. 심지어 병원에서 약 처방받을 때도 약국에 전화해 약국 밖에서 해결하라는 말에 아득했다. 그래서 약국 전화번호를 간판에서 찾아서 전화하는데, 왜 전화가 안 되는 건지. 정말 혼란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기숙사 쪽으로 좀 더 걷다가 다른 약국에서 시도할 생각이었다.
걷다 보니 조금씩 마음이 진정되기 시작했고, 왜 전화가 안되었는지 알 것 같았다. 지역번호를 고려해 함께 전화번호를 입력했어야 했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다른 약국에 도착하고 나서는 마음을 조금 진정하고 전화 걸어 처방을 받을 수 있었다. 약국과 나를 잇는 전달자 분이 굉장히 친절했던 기억이 난다. 어떤 약이 우리 약국에는 없지만 완벽한 대체제가 있고 이걸 써도 괜찮은지, 조제하느라 시간이 조금 걸리는데 서 있어도 괜찮은지 같이 나름 내가 불편해할 사항들을 자상하게 물어보셨다. 그리고 약을 담은 봉지 안에 건빵과 요구르트를 챙겨주시며, 식사하기 불편할 때 이거라도 먹으라는 배려는 참 인류애가 다시 샘솟게 만들었다.
 

스승의 날에 제자는 스승에게 가지 못한다

그러나 솟구쳤던 인류애는 다시 폭삭 내려앉았다. 행정처분이 아주 골치 아팠기 때문이다. 학교 출결관해서는 비대면 수업으로 출석을 대신하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학교 측과 연락하는 건 괜찮았는데, 코로나 격리 지침이 아주 뭣 같았다. 병원에서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았으니 기숙사에서 격리할 순 없고 본가로 돌아가서 격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혼자 KTX나 고속버스 타고 가도 괜찮냐고 보건소에 문의하니 그럴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일말의 희망으로 택시도 안 되냐고 여쭤보니 그렇다고 하셨다. 이게 말이 되나? 마스크도 쓰고 약도 먹었는데, 평일 점심한 적한 시간에 조용히 힘든 몸을 이끌고 집에 가겠다는데 이걸 막는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 게 좋냐고 여쭤보니, 그건 보호자를 불러서 자가용을 타고 이동하는 수밖에 없다고 하셨다. 참으로 무책임하고 엔데믹 시즌에 걸맞은 지침이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아버지께서 내 사정을 듣고 하던 일을 펑크내시고 인천에서 날 데려오겠다고 하셨다. 그래서 이 부분은 한시름 놨는데, 여전히 몇 가지 이슈들이 있어서 긴장을 놓칠 수 없었다. 오후 1시 반부터 4시 반까지 통계학 수업이 있었고 저녁 시간엔 스승의 날로 지도라인 선배님들과 함께 지도라인 교수님을 뵈러 가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통계학 수업은 어쩔 수 없이 ZOOM으로 들었다. 3시 반쯤에 아버지께서 날 데리러 오신다고 하셨기 때문에 그때부턴 데이터 틀고 차 안에서 수업을 듣고자 했다. 그때까지 기숙사에서 혼자, 가지도 못하는 강의실 한편을 비춘 화면을 응시하면서 수업을 들었다. 내가 출석에서 불리지 않고 ZOOM 화면에 잡히니 조금씩 동기들에게서 입질이 왔다. 혹시 코로나냐고 몸은 괜찮냐고. 이걸 코로나 딱 걸렸을 때 예상하고 있던 일이긴 한데 내 예상 밖으로 너무 많은 위로와 안부 톡이 와서 답장하느라 곤란했던(ㅋㅋ;) 기억이 있다. 최고야 우리 22 동기들!
아무튼 그렇게 수업을 듣다가 지도라인 생각이 불현듯 나서 지도라인 단톡방에 죄송하단 말을 남겼다. 너무나 가고 싶은데 못 가서 죄송하다고. 교수님 선물도 함께 돈 모아서 구매했는지라 더욱 아쉬움이 컸다. 선배님들께선 걱정 말고 푹 쉬라는 말이 돌아왔지만 참 마음이 불편했다.
 

다 괜찮데 목이 너무 아프다

 2일 차 열감은 좀 나아졌는데, 목이 너무 아팠다. 침 넘길 때마다 그냥 목이 찢기듯 아팠다. 아침에 난 항상 물 한 컵을 마시는데 이렇게 고통스러운 물 마심은 처음이었다. 오만상 다 찌푸리며, 몸은 계속 비비 꼬우면서 간밤의 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한탄스러운 기분이었다
3일 차 여전히 목이 너무 아프다. 그나마 전날 저녁부터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따뜻한 물을 마시고 있어서 조금씩 개선되는 기분이다. 그래도 아침에 고통스럽게 일어나니 삶의 질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얼른 나았으면 했다.
점심 약 먹고부터는 목에서 이상한 가래 덩어리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기침하여 뱉어냈는데, 한 두 번 정도 그런 것 같다. 의외로 시원하다는 느낌도 받았다.
4일 차 여전히 아침에 기상하면 목부터 체크한다. 그냥 아프다. 그래도 좀 고통에 무던해졌다. 오늘 아침까지만 약이 있어서 그다음부터는 약 없이 지내야 한다. 오늘 점심 때는 살짝 존 것 빼곤 문제가 없었던 것 같다.
5일 차 뭐 했다고 벌써 마지막 평일날이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확실히 목은 거의 아프지 않았다. 다만 뭔가 몸이 100퍼센트 활력을 다 찾은 느낌은 아닌 듯했다. 어제 늦게 자서 그런가 눈도 빨갛고... 후회된다. 오늘은 늦게 자지 말아야지.
6일 차 잠을 길게 자고 일어나니 몸이 아픈지는 잘 모르겠다. 이 정도면 무리 없이 학교 나가도 될 기분이다. 그나저나 내일 지나면 학교에 가야 하는구나. 다 지나고서야 이 시간이 꿈같은 시간이었다는 걸 깨닫는다. 좋은 시절 다 갔다.
 

자가 격리 마지막 날 날아온 메시지. 학교 가야지...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던 시간 

감기랑 다를 게 없다. 바이러스라 변종이 마구마구 생기긴 해서 나도 결국 걸린 것 같다.
mRNA 백신에 대해서 학교에서 배웠었다. 이게 굉장히 획기적이라 21년도에 N차접종받으라고 나라에서 난리 쳤던 것으로 기억한다. 난 3차까지 맞았는데 이렇게 결국 걸린 것을 보면 이 코로나 녀석들도 변종이 굉장히 많아진 것 같다. 
격리기간 동안 생활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밥 먹을 때, 덜어먹는 젓가락과 접시를 따로 써서 뷔페 느낌으로 먹었다는 것? 번거롭긴 한데 그래도 모두를 위해서면 이게 훨씬 나았다. 그리고 수건도 따로 쓰고, 줌 수업을 들었다는 것? 이것도 충분히 감수할 수 있었다.
배뇨, 배변할 때 이상한 쾌락(?)이 느껴졌다. 아직 몸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 확실하게 말할 순 없지만 마치 바이러스가 내 몸의 모든 것들을 배제해 버리려는 기분이 들었다. 몸이 뜨거워서 그랬을 수도 있는데, 생각보다 이게 조금 충격적인 경험이었는지라 이렇게 적어둔다.
 
코로나 블루라는 말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다. 내가 코로나를 걸리게 된 계기 중 하나는 최근 갑자기 우울해진 데에 대한 면역력 감소가  있을 거라 추측한다. 내겐 정신이 신체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최초의 경험이 될 것 같다.
그런데 코로나 걸리고 집에 혼자 틀어박혀있으니 우울한 감이 늘어날 법도 하다. 원래는 1주 격리가 아닌 2주 격리였다고 알고 있는데, 그때는 얼마나 기분이 우울할까. 강제로 자신의 일상을 뺏기는 것도 있지만 이게 상황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질 것은 분명하니까 말이다. 물론 지금의 나는 동기들이 나름 걱정도 해주고. 집에서도 크게 코로나 감염 걱정을 안 해서 가족들과 잘 대화하며 지내고 있다. 그래도 코로나 블루라는 말이 왜 나왔는지 이번에 확실히 알게 된 기회가 되지 않았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