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비무환, 늘 준비되어 있는 자세
유비무환, J 성격유형의 시작
어린 시절 저희 삼 남매는 어머니께서 일하러 가시면,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지도 아래에 생활했었습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나서는 세월의 탓도 있고 나름 자립적으로 지내겠거니 해서 조부모님의 통제가 많이 약해지긴 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인격 성장이나 습관 형성에 다분한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입니다.
제 할아버지께서는 그래도 힘이 닿으시는 데까지 삼 남매를 엄격히 관리하고자 노력하신 것 같습니다. 평생을 초등학교 과학 선생님으로 재직하시고 슬하에 굉장한 교육자 자녀들을 남긴 할아버지께서는 젊은 시절의 그 칼 같은 판단과 엄한 꾸짖음을 그 조그마한 손주들에게 가끔씩 하시곤 하셨으니 말이죠. 생활습관도 정말 FM이셨는데 퇴직하신 이후에도 늘 일찍 기상하셔서 매일 아침 화단에 물을 주고 가정사를 비롯한 할 일들을 화이트보드에 기록해 두시는 일 등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집안을 돌아다니다 보면, 수많은 식물들과 정돈된 책들, 그리고 늘 수기로 기록하는 가계부, 그리고 매일 바뀌고 있는 화이트보드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근데 참 재미난 것이 이 화이트보드에는 늘 날짜가 바뀌고 내용이 바뀌는 것이 있는데, 그중 늘 한결같이 써져 있는 글자가 있었어요. 오래 내버려 두어서 지울 수도 없는 글자. 그것은 우리 집 가훈처럼 받아들여지는 유비무환입니다.
불확실성에 대항하는 방법
어린 시절 내가 그 글자를 처음 보았을 때, 아는 글자가 두개나 있으니 (유와 무) 나머지 글자만 해석하면 그 뜻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도 가정에 컴퓨터 한대쯤은 구비되어서, 옆에 괄호로 쳐져있던 유비무환, 이 4글자를 초록창에 검색해 쉽게 그 뜻을 알 수 있었습니다. 미리 준비하면 근심이 없다. 너무나 당연한 소리지만, 왜 하필이면 이 4글자를 할아버지께서 좋아하셨는지는 아직도 의문이긴 합니다. 제 추측에는 '책임'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당시 박봉이던 교사 월급으로 넉넉지 못한 형편의 가정을 꾸려야 했던 할아버지께서는 그 책임감이 막중했을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돈 관리에 심혈을 기울이게 되고, 그 없는 살림으로 '미리미리' 준비해 불행을 최대한 대비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돈이 없는 것 매한가지일 테지만, 그렇다고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벌벌 떨고 있는 건 그다지 좋지 않은 자세라는 것이죠. 그래서 할아버지께서는 돈과 시간을 계획적으로 쓰시기 위해 노력해 오신 것 같고, 그 덕에 조금 성격이 날카롭고 강인하게 가정을 돌보신 것 같습니다. (물론 지금은 거의 연세가 아흔에 가까워지셔서, 많이 유해지시고 쇠약해지셨긴 합니다...)
아무튼 저는 이런 할아버지 밑에서 자라왔습니다. 그리고 그 할아버지의 귀한 막내딸인 제 어머니도 여전히 조부모님과 가까이 왕래하며 살아왔습니다. 그 덕에 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미리 숙제하고 공부하는 생활로 던져지게 됩니다. 당시엔 그리 유쾌한 생활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지금 보면 미리미리 준비하는 자세가 저에게는 큰 자양분 중 하나가 된 것 같습니다.
지연된 만족을 향해
미리 준비하면 왜 좋은지에 대해 실은 잘 이해할 순 없었습니다. 필요할 때 그때가서 해도 충분한데, 왜 굳이 미리 해야 한다는 것인지 어린 마음에서였죠. 지금 해야 할 일, 원하는 일(놀기, 게임 등등)은 따로 있는데 이걸 하지 말고 과제나 공부를 하라니, 정말 쉽지 않은 도전이었습니다. 그래서인가, 그 밑에서 자라온 저의 형과 여동생은 몇 번씩 튕겨져 나간 적도 있습니다. (물론 청소년기 급격한 호르몬 변화로 인한 것일 수도 있지만) 저야, 둥글둥글하게 살아가길 원해서 그다지 가족 구성원과의 마찰을 피하고 싶어서 묵묵히 과제를 하곤 했지만 왜 그런지는 쉽게 알 순 없었어요. 조금 고통스럽긴 하지만 미리 해두면 나중에 편하다는 정도...? 그 정도로만 알고 생활해 온 ENFJ였지만, 왜 유비무환을 실천해야 하는지는 이번 학기에 들어서서 심리학 수업 때 제대로 알게 된 듯합니다.
이번 심리학 수업 때 인지 심리학 파트에서 지능검사와 지능 지수(IQ)에 대해 다룬 적이 있습니다. 이상성을 가리고자 했던 비율 지능검사 바탕의 지능 검사가 나중 가서는 편차 지능검사로 개인 간 차이를 강조하는 형태로 나아간다는 것이 골자였죠. 이 편차 지능검사의 대표적인 검사로 웩슬러 지능검사에 대해 자세히 배웠습니다.(평균은 100이고 편차는 15고 2 표준편차를 넘어가면 abnormal 대상자이고 어쩌고...) 그때, 교수님께서 지능 지수가 불러올 수 있는 몇 가지 오해에 대해서 다뤄주셨습니다. 재미난 게 지능지수와 성취에는 큰 상관관계가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오히려 성취에는 사회문화적 배경과 지연된 만족 능력이 큰 영향력을 끼친다고 하셨습니다. 즉, 즉각적인 쾌락, 만족을 즐기는 사람보다 그 쾌락을 조금 제쳐두고 참을 수 있는 자가 성공한다는 말이 되겠지요. 공부할 때도 시험기간만 꾹 참고 공부를 열심히 하는 사람이 좋은 성적을 받겠죠? 물론 교수님께서 지능이 높을수록 지연된 만족 능력이 높을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이시긴 했습니다. (당연히 똑똑하지 않은 것보단 똑똑한 게 훨씬 낫긴 하겠죠 ㅜㅜ..)
이에 대해 재미난 사례는 스탠퍼드-비네 검사를 만든 터만(Terman) 박사의 유전연구입니다. 그는 초등학생 중 지능이 상위 1퍼센트 이내의 학생들을 20년간 추적 관찰해 그 성취를 기록하고자 했습니다. 지능이 우월할수록 높은 성취를 기록할 것이라고 성급하게 판단한 것이죠. 그 결과, 그의 아이들(Termites) 중 좋은 성취를 거둔 아이들은 부유한 환경 속에서 자란 아이들이었습니다. 나머지들은 좋은 기회를 잡지 못했고, 그 재능을 발현시킬 환경에 없었기에 변변치 못하게 살아갑니다. 그렇게 터만은 씁쓸하게 자신의 가설이 틀렸음을 인정하게 되지요. 이 결과에서 우린 하나 깨달아야 합니다. 재능도 중요하지만 그 못지않게 더 중요한 것은 환경과 다른 능력(만족 지연능력)이라고 말입니다.
어쩌면 제가 그동안 배워온 유비무환의 자세는 만족 지연능력을 기르는 일 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연히 미리 준비함으로써 몸과 마음에 여유가 생기는 것은 당연한 것이요, 개인 기량(만족 지연능력)도 쌓을 수 있는 일석이조를 맛보고 있던 셈입니다. 그런 걸 보면, 저는 풍족한 환경에서 자라온 건 아니지만 적어도 좋은 가르침과 경험을 줄 수 있는 멋진 환경에서 자라왔다고, 참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드네요.
무질서 속에서 살아본 후기
그런데, 제가 최근에 딱히 계획적이고 준비된 삶을 지낸 것 같진 않아요. 딱 코로나로 일주일 쉬고 나서 완전 생활이 망가졌었기 때문에, 복귀하는데 애 좀 먹었습니다. 코로나동안 과제를 딱히 하고 싶지 않아서 귀찮은 것들은 남겨뒀는데, 그 후폭풍이 너무 거셌습니다 ㅎㅎ... 과제를 모두 마치고 나니 시험 준비할 시간이 일주일도 없어서 되게 헐떡이면서 시험들을 턱턱 봤던 것 같네요. 대충 시험 전날 오후부터 달리고 12시 전에 일찍 자고, 새벽 6시 전후에 일어나 시험 전까지 계속 벼락치기하고 암기하는... 그런 식으로 일주일을 보냈습니다. 이렇게 까지 시험 준비를 안 해본 적이 없는데.. 실제로 이렇게 쪼들리듯이 공부하니, 성적이 잘 나올지 무섭기도 하면서도 꽤 스릴 있고 그래서(?) 전과는 완전 다른 삶을 산 느낌이네요. 심지어는 이러고도 시험을 꽤 잘 본 느낌도 있어서 이 방식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할 지경입니다 ㅋㅋㅋ
그렇게 살다가 반성을 한 시점은 어제 시험인 정보학 공부를 하면서부터입니다. 다른 과목들은 수업을 듣긴 했는데, 머릿속에 남는 게 별로 없어서 시험공부할 때 벼락치기하듯이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정보학은 놀랍게도 머신러닝 파트가 꽤 비중이 많아서 아주 편하게 공부했습니다.(인공지능은 제 전공 교수님들보다 제가 더 잘 알지 않을까요? 크하하) 더욱이 작년 여름에 땄었던 컴활 1급에서도 자주 다루는 주제인 DBMS와 SQL도 나와서 소위말해 '날먹(날로 먹기)'했습니다. 이걸 하고 나니 아주 반성했어요. 미리 준비하니까, 아니 준비가 되어있으니까 너무 편하고 근심이 없는데, 왜 그렇게 스릴을 즐기고 앉았을까. 오히려 이걸 겪고 나니 막 여름방학 때 다음 학기를 미리 예습해 둘까 하는 생각도 드는 거 있죠? 벌써 미리 계획 세우고 있으니 조만간 이 블로그 글에서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ㅎㅎ
그런 걸 보면 최근 본시험들은 제가 그동안 차려온 '시험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못한 기분이에요. 시간 효율을 생각하고 한두 문제 더 암기해서 맞추는 것도 중요하긴 한데, 그전에 시험은 수업을 열심히 듣고 미리 준비한 자의 것이라는 기존의 제 생각과 비추어보면 그에 맞는 생활을 한 것 같지 않아요. 사실 동기들 모두 여유가 없을 정도로 과제도 많고 시험도 많았던 것은 사실인데, 그래도 작년에는 더 정돈되고 예의를 차린, 그리고 원형의 지식(이데아)에 닿는 공부를 해왔던 것에 비하면 성장한 게 없구나 하는 아쉬움도 듭니다. 다음 학기에는 더욱 무시무시한 일들이 많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이번 여름방학에는 유비무환 해서 안전하고 정돈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해야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유비무환 해보시는 건 어떠신가요?^^
참고 문헌
말콤 글레드웰의 아웃라이어
Wikipedia Lewis Terman Lewis Terman - Wiki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