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하는 습관이 앱 사용으로
어렸을 때부터 나는 자주 깜빡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래서 가져온 물품을 두고 오거나, 오늘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곤 했었다. 그래서 내가 내놓은 해결책은 작은 메모장을 활용하는 것. 손안에 들어오는 작은 크기의 메모장을 준비해 항상 들고 다니며 학교 생활을 했었다.
2022년 1학기, 그러니까 내가 제대로 대학에 붙고 나서부터는 디지털 기기로 조금씩 내 생활에 관한 메모를 적기 시작했다. 처음엔 스마트폰으로 '노션'이라는 어플을 이용해 적기 시작했는데, 주로 동기들과의 모임에 대한 내용을 적었다. 조금씩 적응하고 나서는 단순 기록을 넘어서 그때 내 감정이라던지, 사진도 업로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노션에서 왠지 모를 아쉬움이 느껴졌고, 운 좋게도 '옵시디언'이라는 새 어플을 알게 되어서 주 메모 어플이 되었다.
옵시디언의 거대하고 공허한 세계
옵시디언의 가장 큰 장점은 무제한적인 자유도다. 그래서 이 어플을 다루는 사람들은 두 가지에서 크게 힘들어한다고 한다. 첫째는 처음 다운로드를 하고 열었을 때 보이는 아무것도 없는 검은 화면의 막막함이다. 나 역시도 처음에 정말 공허한 우주에 혼자 던져진 것만 한 같은 기분이 든다. (지금도 새 메모를 켜면 그럴 때가 종종 있다) 둘째는 그 자유도를 활용하려면 HTML, Markdown, Github와 같은 여러 프로그래밍 지식들을 배워야 했다. 그래서 배움이 계속 필요했었고, 옵시디언 공식 채팅방에도 들어가 눈팅하며 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옵시디언 유저들이 메모법으로 '제텔카스텔'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을 알게 되었다. 책도 국내에 관련해 2권 정도 출판된 상태였다. 평이 굉장히 좋았어서 어머니께 부탁을 드려 연말부터 읽기 시작했다.
감상
통념을 깨는 메모법
일단 읽고 나서 처음 든 생각은 읽기 잘했다는 것이다. 메모에 대한 이론적인 접근과 실용적인 접근 모두 해낸 것 같다. 이 제텔 카스텔이라는, 독일어로 메모 상자라는 이 개념을 왜 써야 하는지, 왜 이런 효과를 낼 수 있는지 잘 이해시켜 주었다. 적절히 내 평소 생각과 합치되는 부분도 있었고, 오히려 깨우쳐주는 부분도 있어서 정말 좋았었다. 학교에서 배우는, 책에서 들려주는 글쓰기 방법과는 다른 접근을 취하고 있지만 크게 기존 것을 배척하는 수준은 아니었기에 저번 학기에 들었던 글쓰기 수업의 연장선으로 생각하면서 읽었다.
창의성을 길러주는 메모 상자
내가 얻어가야 할 부분들을 정리하자면 크게 5가지 정도 될 것 같다. 첫째는 창의력은 비범한 능력의 영역이 아닌, 경험의 오랜 축적의 결과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흔히 창의성을 발휘하는 사람들을 보면, 자유로운 삶의 루틴 속에서 예술적인 일상을 지낼 거라고 단정 짓는 경우가 많다. 나 역시도 그랬다. 그러나 책 저자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했다. 오히려 자신의 분야에 대한 오랜 경험과 깊은 통찰, 그리고 여러 분야로의 지식 습득을 통한 연결 짓기 등을 통해 점진적으로 이뤄지는 것이라 말했다. 그리고 그 산증인으로 어마어마한 대작가이자 사회학자인 니클라스 루만이 있다고. 그래서 그는 꾸준한 메모 기록과 누적, 그리고 이 메모 더미들인 메모 상자(제텔카스텔)를 보고 생각하는 일을 통해 상향식으로, 메모 더미 속에서 주제를 이끌어내고 글을 쓸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런 점에서 내게 이 책은 정말 와닿았다. 누구든지 근성이 있고, 성실하기만 하면 작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니 말이다.
'자신의 언어'를 찾게 해주는 메모 상자
둘째는 나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의 중요성이다. 이 책은 메모에 정말 진심이다. 그러다 보니 독자들이 어떻게 메모를 쓰는 게 가장 바람직한 일인지 친절히, 이 책 전반에 걸쳐 계속 설명한다. 특히 단순 메모와 영구저장용 메모를 구분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문헌메모도 있긴 한데 그건 일단 제외) 뭔가 떠올랐을 때, 빠르게 핵심만을 적는 일, 그리고 이 단순 메모를 다시 보면서, 정성스레, 자신의 언어로, 어느 상황에 봐도 좋을 그런 영구용 메모로 탈바꿈하는 일을 매우 중요시했다. 그리고 메모를 적을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언어'라고 했다. 자신이 생각하고 자신의 세계를 거친 정보를 지식으로 바꾸어 정리하는 것. 그것이 저자가 제시하고 싶은 이 책의 교훈 중 하나이다.(가능성 표현을 주어선 안 될 것 같다.) 그러려면 충분히 생각한 후, 간결하게 ㅡ 그러나 단순화되진 않은 ㅡ 그런 메모를 작성해야 할 것이다.
연결을 통해 장기 기억화시키는 메모 상자
셋째는 기억(연결)에 관한 것이다. 저자는 메모를 학습에 이용하지 않을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메모를 적으면서, 독자들은 좋은 장기 기억을 가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기 위해선 기억에 대한 메커니즘에 대해 알아야 한다. 그는 '격자형 정신 모형'이라고 하여, 새로운 정보는 기존에 알고 있던 지식과 '연결' 될 때 장기기억으로 전환되기 좋다고 하였다. 단순 읽기에 의한 암기가 아닌, 진정 자신의 것(장기 기억)이 되기 위해선 연결 짓고, 부호를 넣으며, 자신의 것으로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앞으로 내가 학업을 이어나갈 때, 진지한 생각들이 많아졌다. 성적을 위해 단기 기억(암기)을 일삼는 학생이 될 텐가, 진정한 공부를 하기 위해 장기 기억처리를 하는 학생이 될 텐가? 두 마리의 토끼 모두를 잡는 사람이 될 수 있게 노력하는 게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래도 후자의 것이 나에게 더 잘 맞는다는 걸 알기에 메모상자를 학업에 이용하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스키마로 표현하면 더 좋은 메모 상자
넷째는 스키마(schema)에 관한 것이다.(p.129) 나는 이원준학파이기 때문에 생각의 틀로서의 스키마를 굉장히 칭송하는 사람 중 하나이다. 저자는 아쉽게도 스키마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은 듯 보이나 '패턴'이라는 말을 쓴다. 그리고 이것이 스키마를 가리키는 개념이라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그 '패턴'을 빠르게 알게 되면, 해당 분야의 글을 읽는 속도가 빨라지는 것은 물론이요, 경험과 결부시키기 시작시키면 찰리 멍거가 말하는 'Worldly wisdom'을 얻게 된다고 했다.(p.181) 과연 매우 동감하는 부분이다. 단순 스키마는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편협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온전히 나의 정신을 이루는 단순하면서 복잡한 세계가 된다면, 세상을 꿰뚫어 보는 눈으로 만들 것이라고 확신한다.
요즘 들어서는 공부를 제대로 안 하다 보니 스키마를 잘 쓰진 않았다. 스키마를 다시 나의 것으로 만들고 내 공부에도 활용하면서, 내 글쓰기에도 활용할 수 있게 하면 좋을 것이다.(p.112)
틀을 깨는 메모를 하라
마지막은 글쓰기의 거대한 힘에 관한 것이다. 저자는 글쓰기에 관한 여러 통념들을 계속 비판한다. 글쓰기는 계획적이지도, 선형적이지도, 맨 땅에도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이다. 대신에 차근차근 메모하고, 정리하고, 생각하고, 개요를 짜고, 퇴고하면서 이뤄지는 것이라고 조언한다. 이 단계를 오롯이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일이라고, 계획을 세워 그대로 해내겠다는 것은 좋지 못한 태도인 것이다. 그러기에 조금씩 분량을 정해서, 조금씩 목표치를 정해 이뤄가면 좋을 것이다. 그러면 진화하고, 창발 하는 아이디어를 얻을지 누가 알겠는가? 작업을 일처럼 생각하지 말고, 즐기면서 하는 것. 그것이 이 책이 선사하는 큰 가르침일 것이다.
마무리
일단 이 책을 읽고 나니 내 메모 습관을 크게 바꿔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 스마트폰 케이스를 바꿔서, S pen으로 가볍게 필기하기 좋게 만들어, 자주 단순 메모를 남길 생각이다. 그리고 이 옵시디언은 내가 정보 저장용도로 쓰는 것을 넘어서 영구저장용 메모를 남길 수 있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 내가 정말 아끼는, 번뜩이는 글들을 많이 써서 교내 잡지에도 올리고, 블로그에도 올릴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이 책이 말하는 대로 최대한 따라 해 보면 뭐라도 달라지겠지. 혹시 몰라 내가 나중엔 근사한 작가님으로 이름을 떨칠지?
2023.1.21 완독
추신
오사카 여행 때 읽던 책을 이리 다시 볼 줄이야. 도쿄 디즈니씨에서 어트랙션 줄을 서서 기다리다, 너무 무료해 옵시디언을 뒤졌다. 그러다가 몇 권 써둔 독후감을 발견해서, 이렇게 티스토리에 다시 한번 가공해서 올린다. 저 당시에 통념 깨는 부분이 마음에 들었는데, 6개월이 지난 지금, 그다지 기억에 남는 부분이 없다. 메모를 생활화하면서, 이 책 내용을 잘 복기해 활용할 수 있게 하자.
+ 스마트폰 케이스는 잘 바꿔놔서 흔들림이 덜어졌다. 그 덕에 s pen메모는 확실히 많이 쓰는 것 같다. 다행이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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