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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BOOK

[거꾸로 읽는 세계사] 한 곳으로 수렴하는 이야기

지적 바다로 뛰어드는 데 도움을 준 호영이

원하던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독서를 많이 하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리고 실제로 시간을 투자해 독서량을 늘릴 수 있었다. 그래서 아는 사람들 중에서 조금 박식한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할 땐 고상하게 지식을  나누는 경우가 늘었다. 고등학교 후배인 호영이가 대표적인 경우였다. 지적 대활 하기에 충분한 지식풀을 가졌고, 그 덕분에 국어 성적도 좋은 편이었으니 말이다. 적어도 내가 그 얘한테서 배울 점이 분명 있다고 판단해, 자주 2022년에 만나서 자주 밥도 사주고 연락했었다.
한 5월쯤, 내가 인하대에서 고깃집에 데려간 적이 있는데, 그때 내가 책 사피엔스 얘기를 꺼냈었다. 호영이는 사피엔스는 아직 안 읽어봤지만 이 책을 추천해 줬었고, 나는 기억 어느 한편에 남겨두었다. 그래서 학교 도서관을 통해 읽으려 했지만, 인기가 많아서 바로 빌릴 수 없었다. 오기가 생겨 알라딘 중고서적을 이용해 접했고, 사 둔지 거진 4개월은 족히 지난 12월 말에 다 읽어버렸다.

딱 이 연두색 표지. 가만보면 유시민은 초록 계열 색상을 좋아할지도..?

유시민, 여전히 글을 쓰는 사내

저자 유시민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다. 미디어에 자주 얼굴을 비치며, 예전엔 정치인이었다는 그. 그가 한창 학생운동하던 시기 지었다는 이 책을 다시 2021년 개정하면서 그 간의 실수들을 깨끗이 인정하는 서문이 꽤 마음에 들었다. 책은 크게 11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 20세기 큰 영향력을 끼친 사건들을 그가 나름대로 조직해서 배경지식과 더불어 그의 생각과 역사적 의의를 남기는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유시민이 글쓰기 수업 때도 참고자료로 나올 정도로 글 솜씨가 대단한 건 익히 알고 있었다. 과연 정말 이야기를 푸는 능력이 뛰어나 술술 읽을 수 있었다.

감상

민주주의가 싹트지만, 햇빛은 전운에 가렸다

첫 번째는 드레퓌스 사건이다. 이 책으로 처음 알게 된 에피소드였다. 저자가 나중에 후술하듯 뒤에 서술할 사건들에 비하면 영향력은 매우 약한 편이다. 그러나 국가에 충성하던 군 장교의 누명, 그리고 군의 은폐, 대중들의 공개 요구 등은 민주주의의 진수를 잘 담아냈다고 생각한다. 그러고는 조금씩 드리워지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독단이 수면 위로 드러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던 사건이었다.
그다음은 사라예보 사건이다. 크게 기억나는 건 없다. 제1차 세계대전의 포문을 연 사건이라는 것 정도? 추가적으로 유럽 국가들의 위치와 편 가르기를 조금씩 이해하고 재미를 느끼기 시작한 부분이었다.

추위와 배고픔 앞에서 국민들이 본 것, 러시아

세 번째는 러시아 혁명이었다. 왜 러시아가 사회주의 노선을 탔었는지 알 수 있던 에피소드였다. 처절한 가난과 추위 속에서 레닌이 불러온 '혁명의 바람'은 소수파에서 다수파로, 러시아 국민들의 지지를 얻기 충분했을 것이다. '볼셰비키'라는 말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고, 러시아가 그래도 세계적인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유시민의 세계가 고스란히 느껴졌던 대공항 파트

네 번째는 대공황이다. 가장 유시민의 능력이 돋보이는 전공 지식과 필력이 두드러지는 내용이 아니였나 싶다. 공황의 의미를 친절하게 풀어써주고, 다양한 경제학자들의 이론을 알기 쉽게 서술한 것이 너무 좋았다. 보완 도식을 쓰기도 좋았고, 일련의 흐름이 느껴지게 쓴 것이 감동적이었다. 그리고 이 사건이 미국과 독일의 정치에도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경제와 정치 역시도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알 수 있었다.

한 편의 드라마같은 서사의 주인공들, 중국과 독일

다섯 번째는 중국의 탄생이다. 러시아와 비슷한 사회주의 혁명 과정을 다루고 있지만, 아시아인만의 그 처절한 투쟁, 연대가 잘 느껴지는 서사였다. 마오쩌둥과 장제스의 대결, 그리고 여러 조력자들이 이뤄가는 이야기는 고전 소설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정말 절박함이 느껴졌었다. 개인적으로는 중국 현대사에 대해 아는 게 없었는데 그 공백을 아주 적절하게 채우면서, 알고 있던 지식(장제스가 대만 건국)들이 연결되는 기분은 정말이지 읽는 맛을 더했다.
여섯 번째 히틀러 역시 비슷했다. 그동안 많은 교양 지식들이 히틀러에 대해서 자주 다뤘기 때문에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을 하나의 커다란 서사로 기둥을 세우고 알고 있던 지식으로 가지 치는 맛을 느꼈다. 최근에 읽은 '자유로부터의 도피'( [자유로부터의 도피] 고독과 맞설 수 있는 자만이 진정한 자유를 얻을 지어니 (tistory.com) )와 '죽음의 수용소에서' 가 서사 사이에 끼워지는 느낌이 썩 좋았다.

영원한 앙숙으로 남을 두 나라,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일곱 번째 팔레스타인은 가장 재미가 없었다. 사실 중동 지방은 종교 갈등부터 해서 아주 복잡하게 서로 얽혀 있어 어디서부터 접근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 책도 결국 한계점에 도달했던 것 같다. 대충 독자들이 알아서 찾아보겠거니 하고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갈등을 위주로 담았다. 가장 재미없어서 조금 졸 뻔했던 에피소드이다. 유대인들이 학문적으로 뛰어나다고는 알고 있었지만 윤리적으로는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 의외였다.

따뜻한 남쪽 나라 이야기, 베트남

여덟 번째 베트남 에피소드는 이상하게 가보고 싶다는 욕구가 들게 했다. 가장 행복 지수가 높다는 이 사회주의 국가. 그 국가가 우리나라처럼 분단되어 있다 통일되었다는 이야기는 뒤편이었다. 그저 한번 가봐서 베트남 전쟁 때 우리 군인이 남긴 후유증을 위로하고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 싶다는 생각이 컸었다. 무엇보다도 그네들의 문화가 따뜻한 이미지로 박혀있어서 좋게 읽혔던 것 같다.

변혁의 움직임이 도사리는 20세기 말

나머지 세 가지 이야기는 새해 첫날에 다 읽었다.
아홉 번째 이야기는 '맬컴 엑스'라는 흑인 운동가에 관한 이야기였다. 마치 다크 히어로처럼 스스로 악역을 자처해 흑인 인권을 변화시키려고 한 점이 재미있었다. 물론 마틴 루터 킹과 다르게 그는 역사에서 크게 두드러지진 못했다. 그러나 어쩌면 자주적으로 움직이자는 그의 정신은 오늘날에도 유효할 것이다.
열 번째 이야기인 '핵무기'는 가장 읽기 편했다. 내가 이과라 그런지 배경지식 부분은 아주 편하게 읽었다. 그러면서도 핵무기가 냉전시대를 상징하는 키워드였고 오늘날의 북한이 나대는 것을 담은 뉴스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많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쿠바나 이라크 같은 국가와의 지구촌 갈등도 결국 핵과 연결되어 있다는 게 흥미로웠다.
마지막 이야기는 '사회주의 국가의 해체'이다. 이 사건들의 배경에는 사회주의와 독재가 갖고 있는 병적인 문제가 크긴 했지만, 가장 중요한 트리거는 고르반초프의 사상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고르반초프의 개혁은 동독 붕괴와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의 변혁으로 이끌었다. 그러면서 결국 고국의 체계마저 무너뜨렸다. 그는 국가 최고자 자리에 이를 때까지 자신의 사상을 숨기며 사회주의와 민주주의 사이 적당한 줄타기를 했다. 그가 그럴 수 있던 배경에는 혁명 역사에 없었던 새로운 세대였었고, 비판적으로 사고했으며, 다양한 사상들을 접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이 에피소드를 읽으며 고르반초프에 공감하면서 읽을 수 있었다. 아직 내 사상이 어느 쪽으로 굳히진 않았으나, 적어도 기회를 보며 자신이 옳다고 생각되는 신념을 따라 '낭만적인 삶'을 살 수 있는 자세. 그것은 내가 앞으로 사회와 소통할 때 가장 필요할 자세이지 않을까 싶다.

 

역사는 여기서 멈출 것인가? : 21세기를 맞이하며

마지막 에필로그에는 저자가 20세기 이야기를 간단히 재서술하면서 못다 한 이야기들, 그리고 새로운 21세기 사건들을 맞이하는 태도가 담겼다. '역사의 시간'이 머지않아 종결될 시점에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겠는가? 그는 걱정이 매우 많아 보였지만 은연중에 희망적인 미래를 제시하며 마무리했다. 지구촌은 아직 전쟁이 한창이고 코로나라는 지구촌 문제를 앓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부족 본능(우익)이 지적 재능(좌익)을 앞서고 있다고 했다. 그렇지만 이대로 포기해서는 역사는 진행되지 않기 때문에, 계속해서 지적 재능을 발휘해 초국가적인 관리를 이루려는 노력을 멈춰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나아가서는 인류를 위해 그 재능을 올바른 곳에 사용할 수 있도록 21세기를 슬기롭게 살아가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하나의 길로 모여 미래로 뻗어나가는 세계

내가 22살이 되기까지 배워온 지식들이 인류가 걸어온 이 11가지 서사에 한데 묶인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만큼 유시민이 세계사에서 굵직한 사건들만을 골랐다는 것이겠지. 독자들이 튼튼한 '역사기둥'을 세울 수 있도록 지대한 관심을 쏟았다는 인상을 받았다. 개인적으로는 매우 만족스러운 독서였다. 앞으로 21세기 지구촌 뉴스에도 관심을 갖고 스스로의 입장을 잘 취하도록 해야겠다.

 

2023.7.26

추신

부족한 세계사 상식을 심는데 큰 도움을 받았던 책이다. 그렇지만, 7개월이 지난 지금에는 크게 남아있는 내용은 없다. 기억이 가물가물해질 때면 가끔 꺼내 읽자.